솔루엠은 8월 3일 ERP를 SAP로 전면 전환하며 클린 코어 원칙을 설계 단계부터 적용해 "덜 만들고 더 표준에 맞춘다"는 방향을 세웠다.
삼성SDS는 CSP 매출 24%·MSP 매출 17% 성장했고 현대오토에버도 ERP 전환 수요로 매출 20%·영업이익 11.3% 늘었지만, 그룹 의존도가 높은 포스코DX는 매출 14.8%·영업이익 42.3% 감소했다.
SAP인사이더는 맞춤 코드가 "완벽하게 맞는 양복"이었다가 업그레이드 시점에 "구속복"으로 돌변한다고 지적하며, 클린 코어 전환을 "10%는 기술, 90%는 규율"이라 표현한다.
SAP가 제공하는 진단 도구로 과거 커스터마이즈 중 실제로 쓰이지 않는 부분이 얼마나 되는지 세어보는 것이 표준화의 첫걸음이다.
국내 ERP 구축 현장에는 오래된 질문이 하나 있었다. "표준 프로세스로 갈까요, 맞춤 개발로 갈까요." 대부분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맞춤 개발. 우리 회사는 특별하니까. 그 선택이 10년 뒤 업그레이드 시점에 수백억 원짜리 기술 부채로 돌아왔다. 그런데 지금, 그 질문의 정답이 뒤집히고 있다. 맞춤 개발을 자랑하던 기업들이 오히려 표준에 맞추는 쪽으로 줄을 서고 있다.
솔루엠, SAP 전면 전환의 진짜 이유는 '표준화'였다
전자부품·AI 기업 솔루엠은 지난 8월 3일부로 전사자원관리(ERP) 시스템을 SAP로 전면 전환했다. 주목할 점은 시스템 교체 그 자체가 아니라, 글로벌 ERP 업계의 최신 기준인 '클린 코어(Clean Core)' 원칙을 설계 단계부터 적용했다는 사실이다. 클린 코어는 ERP 핵심을 SAP 표준에 최대한 가깝게 유지하고, 기업별 특화 요구사항은 표준 API와 별도 확장 영역(BTP·RAP)에서 구현하는 방식이다.
솔루엠은 이번 전환으로 세 가지 성과를 동시에 거뒀다고 밝혔다. 사업장별로 제각각이던 업무 프로세스를 표준화해 신규 법인이 늘어나도 같은 기준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고, 사용 빈도가 낮거나 SAP 표준 기능으로 대체 가능한 프로그램은 과감히 정리했다. 오류가 있거나 추적이 어려운 데이터는 정제해 신뢰도 높은 필수 데이터 중심으로 이관했다. 회사가 프로젝트 전 과정에서 유지한 원칙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덜 만들고, 더 표준에 맞춘다."
솔루엠 PI 송인한 그룹장은 이번 전환의 핵심을 이렇게 정리했다. "SAP 도입이 아니라, 경영진이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 표준화 원칙을 실제 업무 시스템에 구현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기술이 아니라 태도의 전환이다. 시스템을 회사 관행에 맞추는 대신, 회사 프로세스를 표준에 맞춘다는 발상의 전환 말이다.
SI 빅4 실적이 증명한다, ERP 전환이 돈이 된다
이런 흐름은 국내 대형 SI 기업들의 2분기 실적에서도 확인된다. 머니투데이에 따르면 삼성SDS는 클라우드 공급자(CSP) 부문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24% 증가했고, 관리형 서비스(MSP) 매출도 17% 늘었다. 성장을 견인한 동력 중 하나로 금융 업종의 AX 사업과 함께 조선 업종의 ERP 사업이 꼽혔다. 현대오토에버 역시 그룹사 차세대 ERP 전환 구축과 클라우드 수요 증가에 힘입어 매출 20%, 영업이익 11.3% 증가를 기록했다.
LG CNS는 AI·클라우드 사업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5.1% 늘며 AI 인프라 구축과 유지보수에서 안정적인 성장을 이어갔다. 반면 포스코DX는 그룹사 투자 조정 여파로 매출 14.8%, 영업이익 42.3% 감소하며 대조를 이뤘다. 2분기 대외 고객 비중이 3%에 그친 점이 과제로 지적됐다. 같은 AI·클라우드 시기라도, 표준화된 ERP 전환 수요를 안정적으로 확보한 기업과 그룹 의존도가 높은 기업의 실적이 갈린 셈이다.
맞춤 개발이 왜 함정이 됐나
맞춤 개발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SAP가 설명하는 클린 코어의 논리는 이렇다. 전통적인 ERP는 고객 요구에 맞춰 무겁게 커스터마이즈됐고, 그 커스텀 코드가 쌓일수록 시스템은 유지보수가 어렵고 업그레이드가 비싸며 오류에 취약해진다. SAP인사이더의 표현을 빌리면, 맞춤 코드는 "완벽하게 맞는 양복"이었다가 업그레이드 시점에 "구속복(straitjacket)"으로 돌변한다. 업그레이드 한 번에 수백만 달러가 들고, 커스텀 코드 한 줄 한 줄을 검증하고 고쳐야 하기 때문이다.
클라우드 ERP에서는 업데이트가 자동으로, 자주 일어난다. 핵심에 커스텀 코드가 잔뜩 얹혀 있으면 그 업데이트가 시스템을 깨뜨린다. 그래서 표준에 가깝게 유지하고, 차별화가 필요한 부분만 확장 영역에서 구현하는 게 클린 코어의 핵심이다. SAP인사이더는 이 전환을 두고 "10%는 기술, 90%는 규율"이라고 단언한다. "우리 프로세스에 시스템을 어떻게 맞출까"에서 "표준 프로세스에 우리를 어떻게 맞출까"로 질문을 바꾸는 마인드셋의 변화가 없다면 클린 코어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지점이 국내 SI 현장에 특히 날카롭게 와닿는 이유가 있다. 그동안 현장에서는 모든 맞춤 요구에 "된다"고 답하는 것이 일이었다. 클린 코어는 그 질문에 "된다. 다만 코어가 아니라 플랫폼 위에서"라고 답하는 새로운 규율을 요구한다. 개발자를 핵심 수정자에서 앱 빌더로 전환시키는 재교육, 그리고 맞춤 요청을 검토하는 거버넌스 위원회까지. 겉으로는 ERP 교체지만, 실제로는 조직의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 문화 프로젝트다.
늦지 않았다, 표준화 원칙부터 세우면 된다
솔루엠의 사례가 의미 있는 이유는 이 회사가 특별히 거대한 기업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글로벌 사업장이 늘어나는 중견기업이 "지금 표준화하지 않으면 법인이 늘어날 때마다 비용이 복리로 불어난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데 있다. 삼성SDS와 현대오토에버의 실적은 이런 ERP 전환 수요가 당분간 이어질 것임을 보여준다. 포스코DX의 부진은 반대로, 그룹 의존에서 벗어나 표준화된 대외 수요를 확보하지 못하면 아무리 AI를 내세워도 흔들릴 수 있다는 경고다.
ERP 담당자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 SAP로 갈아타는 일이 아니다. 먼저 지금 시스템에 쌓인 커스텀 코드 중 실제로 쓰이지 않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세어보는 것부터다. SAP가 제공하는 진단 도구는 과거 커스터마이즈가 얼마나 쌓였고 그중 얼마가 한 번도 쓰이지 않았는지를 보여준다. 그 숫자를 보면, "왜 우리가 이렇게까지 만들었지"라는 질문이 저절로 나온다. 표준화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그 질문 하나에서 시작된다. 늦지 않았다. 다만 더 늦기 전에, 덜 만드는 용기를 내야 한다.
참고 자료
- 솔루엠 — SAP 전면 전환 및 클린 코어 적용 사례, 송인한 PI 그룹장 발언(2026년 8월)
- 머니투데이 — 삼성SDS·현대오토에버·LG CNS·포스코DX 2분기 실적 보도
- SAP인사이더 — 클린 코어 개념 및 커스터마이즈 리스크 설명("10%는 기술, 90%는 규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