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심사역을 대체한다." "은행원은 이제 필요 없다." 금융권 AI를 둘러싼 불안 섞인 전망은 매년 반복된다. 그런데 실제 현장은 다르다. 기업대출 심사의견서를 한 장 쓰는 데 30분 걸리던 일이 10초 만에 끝나지만, 최종 승인은 심사역이 내린다. KB국민은행의 AI 탐지 시스템은 지난해 보이스피싱 피해 1,720억 원을 막았지만, 피해가 급증하자 전담 인력을 2배로 늘렸다. 숫자는 말해준다. 금융권 AI는 사람을 대체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의 판단을 보조하는 도구다.
하나은행 AI 심사의견 생성 시스템으로 대출심사 초안 작성시간이 30분→10초로 단축(연 7만 건, 2만 7,000시간 절감), 단 최종 승인은 심사역이 맡는다
KB국민은행 AI 이상거래 탐지로 3년간 누적 2,480억 원의 보이스피싱 피해를 예방했지만, 피해가 808억 원으로 급증하자 전담 인력을 2배로 늘렸다
삼성화재 장기U 시스템은 전 계약을 AI가 1차 심사(승인율 71%→90%)하되, 복잡한 사례 10%는 직원이 직접 심사한다
DB손해보험은 블랙박스 과실 판정 AI 정확도 92.4%(20개월·7만 건 학습), 판정 시간 5초 — 정확도가 높을수록 남은 오차에 대한 통제가 더 정밀해진다
대출심사 — 30분이 10초가 됐다
하나은행은 2026년 3월 금융권 최초로 기업대출 AI 심사의견 생성 시스템을 도입했다. 재무제표, 기업정보, 산업동향을 AI가 분석해 심사 초안을 자동 생성한다. 연간 7만 건의 신용평가 업무에서 2만 7,000시간이 절감된다. 7월에는 주택담보대출과 전세대출, 정책성대출로 적용 범위를 확대했다.
신한은행은 12개 산업 특화분석 엔진을 가진 여신심사지원 에이전트를 운영 중이다. LLM과 기업분석 노하우를 결합했다. 감정평가서는 AI가 점검한다. LLM에 RPA와 OCR을 붙여 금융권 최초로 적용했다. NH농협은행은 본심사급 사전심사부터 심사보고서 작성 자동화까지 처리하는 PASS 체계를 구축했다. 우리금융은 여신 접수에서 사후관리까지 전 과정에 AI를 심었다. 한국수출입은행은 AI 여신심사 시스템과 기업금융 서류심사를 도입했다.
눈여겨볼 건 하나은행의 선택이다. 인하우스 모델을 썼다. 외부 API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 구축했다. 금융 데이터의 민감성 때문이다. 초안은 AI가 쓰고, 승인은 심사역이 한다. 30분이 10초가 되어도 책임의 무게는 그대로 남는다.
보이스피싱 탐지 — 3년 누적 2,480억을 막았다
KB국민은행의 AI 이상거래 탐지 실적은 숫자로 말한다. 2023년 427억, 2024년 333억, 2025년 1,720억. 3년 누적 보이스피싱 예방액이 2,480억 원이다. 지난해 8월 한 달만 사기계좌 1,306건에 225억 원을 막았다. 금융사기예방 전담 유닛을 신설하고 10명을 배치했다.
신한은행은 ATM에서 이상행동을 잡아낸다. 2022년 12월 은행권 최초로 도입한 딥러닝 기반 탐지 시스템이 올 1분기에만 1만 1,451건을 적발했다. 75세 이상 고객의 고액 반복 인출, 비정상 시간대 거래까지 감지해 치매 의심 사례까지 포착한다. 카카오뱅크는 거래 전후 행동 흐름을 분석하는 시퀀스 탐지 모델을 자체 개발해 이상거래탐지시스템에 적용했다.
그러나 AI 탐지가 만능은 아니다. KB국민은행이 가상자산 거래소와 제휴한 후 보이스피싱 피해가 808억 원으로 2.5배 급증하자 전담 인력을 2배로 늘렸다. 정부가 추진하는 무과실 배상책임제는 예방 시스템을 비용 통제 수단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탐지 정확도가 올라갈수록 오탐 대응 체계도 함께 설계해야 하는 이유다.
보험 심사 — 92.4% 정확도와 남겨둔 10%
삼성화재의 장기U 시스템은 2021년 보험업계 최초로 AI 인수심사를 도입했다. 초기에는 전체 심사의 70%를 처리했지만 현재는 전 계약을 AI가 1차 심사한다. 승인율은 71%에서 90%까지 올랐다. AI 의료심사는 진단서와 수술기록지를 OCR과 생성형 AI로 분석해 심사 인력의 검토 비중을 70% 낮췄다.
DB손해보험은 블랙박스 영상 과실 판정에 AI를 쓴다. 20개월간 7만 건을 학습해 정확도 92.4%를 기록했다. 판정 시간은 5초. 현대해상은 자동심사 시스템 2Q-PASS를 2025년 5월 도입했고 KAIST와 산학협력 중이다. 미래에셋생명은 LLM 기반 언더라이팅 AI-FIT를 업계 최초로 적용했다. 메리츠화재는 LLM 콜센터를, 한화생명은 AI로 설계사 화법을 분석해 판매 실적을 40% 끌어올렸다.
그런데 삼성화재가 AI로 처리하지 않고 남겨둔 10%가 있다. 복잡한 질병 이력, 희귀 케이스, 판단이 애매한 경계선상의 사례들이다. 이 10%는 직원이 직접 심사한다. 92.4% 정확도는 곧 7.6%의 불확실성을 뜻한다. 정확도가 높을수록 남은 오차에 대한 통제가 더 정밀해야 한다는 역설이다.
여기에는 규제의 무게도 작용한다. 보험사가 AI 심사 결과만으로 보험금 지급을 거절하면 금융소비자보호법상 설명 의무를 위반할 수 있다. 금융당국도 망분리 완화를 포함한 AX 규제 개편에 착수한 상태다. 규제가 풀리면 AI 활용 폭은 더 넓어지지만, 그만큼 설명 책임과 이의제기 절차에 대한 요구도 높아진다. DB손보의 블랙박스 과실 판정도 92.4% 정확도지만 나머지 7.6%에 대해서는 결국 사람이 영상을 다시 본다. AI가 확신하지 못하는 경계 영역일수록 설명 책임은 더 무거워진다.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통제 비용도 함께 올라간다는 점을 보험사들은 이미 체감하고 있다.
진짜 승부는 통제 체계다
금융권 AI 도입에는 공통된 패턴이 있다. AI는 초안을 쓰고, 탐지 신호를 보내고, 1차 심사를 한다. 최종 판단은 사람이 내린다. 하나은행의 심사역도, KB의 사기대응팀도, 삼성화재의 인수심사 직원도 AI의 출력물 위에서 승인과 기각을 결정한다.
30분 걸리던 일이 10초가 되었을 때 책임 소재는 어디로 가는가. 탐지가 빨라졌을 때 오탐 대응은 누가 하는가. 자동화가 깊어질수록 설명 가능성과 이의제기 절차가 더 정교해져야 한다. 금융 AI의 진짜 경쟁력은 모델 성능이 아니라 통제 체계에 있다. 1,720억을 막은 KB의 시스템 뒤에는 전담 인력 10명이 있었고 피해가 급증하자 인력을 2배로 늘렸다. 숫자 뒤의 사람과 프로세스를 보라는 얘기다.
생각보다 늦지 않았다. AI 도입을 검토하는 금융사라면 거창한 모델부터 찾지 말라. 정확도 수치에 집착하지 말라. AI가 내놓은 판단을 누가 검증하고, 이의제기는 어떻게 받으며, 오탐이 발생했을 때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지 — 그 통제 체계를 먼저 설계하는 회사가 결국 AI를 제대로 쓰는 회사가 된다.
참고 자료
- 하나은행, 신한은행, NH농협은행 AI 여신심사 시스템 도입 보도
- KB국민은행 AI 이상거래탐지 실적 공개자료
- 삼성화재, DB손해보험, 현대해상 AI 보험심사 도입 사례
- 금융당국 AX 규제 개편(망분리 완화 포함) 관련 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