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화학은 장치산업이다. 공장이 멈추면 분당 수백만 원이 증발한다. 그런데 지금 이 업계에 두 가지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들고 있다. 하나는 AI가 사람 일자리를 대체할 것이라는 공포. 다른 하나는 AI 투자를 안 하면 경쟁에서 도태될 것이라는 불안. 둘 다 절반만 맞다. 울산 미포산단에서 SK에너지가 공정 데이터 1000억 건을 정부에 넘겼다. 아부다비 루와이스에서는 AI가 제어실 알람을 예측해 운영자보다 먼저 움직인다. 수십 년 묵은 플랜트에 AI를 어떻게 이식할 것인가. 답은 셋이다. 데이터를 나눠 쓰거나, AI에게 제어실을 맡기거나, 20만 개 센서로 모든 설비를 감시하거나.

SK에너지가 1000억 건 데이터를 내놓은 이유

SK에너지는 산업통상자원부 '울산 AX 실증산단 구축사업'의 선도공장이다. 공정·설비·안전관리 데이터 1000억 건을 울산정보산업진흥원에 넘겼다. 총사업비 290억원, 2028년 12월까지 40개월간 미포국가산단에서 진행한다.

목표는 단순한 공정 개선이 아니다. 석유화학에 특화된 버티컬 AI 모델을 구축하는 것이다. 원유가 들어올 때마다 휘발유·경유·나프타 중 가장 수익성 높은 조합을 찾아내고, 고장 징후를 넘어 대응 방안까지 제시하는 에이전트형 AI, 영상 분석과 작업허가를 결합한 안전 관리까지. 세 개의 축이 동시에 돌아간다.

여기서 중요한 건 SK에너지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정부는 2030년까지 AX 실증산단을 25개소로 확대할 계획이다. 단일 기업의 데이터로는 고도화된 모델을 만들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산단 내 기업들이 데이터를 공유해 공동 모델을 만든다. 검증된 모델은 지역 중소기업에 경량화해서 적용하는 구조다. 대기업 한 곳의 성공담이 아니라 산단 전체의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설계다.

아부다비 보루게, 제어실에 AI를 앉히다

2026년 1월, 아부다비 보루게가 석유화학 업계 최초로 AI 자율운전 실증을 끝냈다. 허니웰의 익스페리온 코그니션이 제어실 알람을 평균 5~10분 전에 예측한다. 실증 결과 효율 20% 향상, 다운타임 20% 감소, 운영비 15% 절감이 기대된다.

진짜 의미는 인력 대체가 아니다. 보루게의 AI·디지털 프로그램은 2025년 한 해 5억 7500만 달러의 가치 창출을 목표로 잡았다. 숙련 운영자가 은퇴해도 신입이 AI 에이전트의 추천과 자동 결정으로 베테랑 수준의 운전을 유지할 수 있다. 자동화의 진짜 목표는 숙련도 편차를 없애는 것이다. 30년 경력자의 판단을 시스템에 내장해, 누가 교대를 서든 같은 품질의 의사결정이 나오게 하는 것.

사우디 아람코도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 에머슨의 하이브리드 모델로 정제 계획을 최적화해 수율·품질 예측 정확도 98.5%를 달성했다. 판단의 주체가 사람에서 AI로, 그리고 사람과 AI의 협업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GS칼텍스 여수공장, 20만 센서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GS칼텍스 여수공장에는 80만 개 설비에 20만 개 이상의 센서가 붙어 있다. 2019년 DX 전략팀 출범 이후 누적 200건 이상의 유스케이스를 발굴했고, 2024년 140건, 2025년 1분기에만 72건을 현장에 적용했다. 로우코드 AI 플랫폼 'AiU'는 월 2713명이 쓴다. 직원 3000여 명 중 거의 전원이다.

원프레딕트의 '가디원터보'는 터빈·압축기 같은 대형 회전기계의 결함 15종을 실시간으로 진단한다. 금호석유화학 여수사업장은 이노뎁과 AI 안전관제 시스템을 구축해 보호구 미착용·화재·무단침입을 자동 감지한다. 2026년 7월 기준, AI 안전 관제가 공공 영역을 넘어 민간 대기업 핵심 시설로 확산되는 중이다.

관건은 도입이 아니다. 센서를 붙이고 대시보드를 띄우는 건 1단계에 불과하다. 진짜 싸움은 그다음이다. 현장 데이터가 계속 들어와야 모델이 늙지 않는다. 데이터가 끊기면 AI는 6개월 만에 무용지물이 된다.

숫자가 말해주는 것: ROI는 이미 나왔다

S-OIL은 3년간 255억원을 투입해 30여 개 시스템을 통합했다. 연간 200억원 이상의 경제적 효과를 거뒀다. 1년 3개월 만에 투자비를 회수한 셈이다. LG화학은 APC로 연 54억원, Mtell로 연 48억원을 절감 중이다. 다우케미칼은 통합 플랫폼 도입 후 단일 제품 대비 10~15배 수익성을 보고했다.

이 숫자들이 현장 실무자가 경영진에게 가져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우리와 비슷한 공정에서 이만큼 돈을 벌었다'는 구체적 사례 없이 AI 도입을 설득할 수 없다. 보루게가 목표로 잡은 연간 5억 7500만 달러도, GS칼텍스의 월 2713명 사용도 결국 같은 이야기다. AI는 비용이 아니라 투자다. 그리고 투자 회수 기간은 생각보다 짧다.

데이터를 나누는 자가 살아남는다

세 회사의 접근법은 다르지만 공통점은 분명하다. 검증된 모델을 단독으로 쓰지 않고 현장 데이터로 계속 갱신한다는 것. SK에너지는 산단 내 기업들과 데이터를 공유해 공동 모델을 만들고, 보루게는 AI가 제어실 판단을 실시간으로 학습하며, GS칼텍스는 20만 센서에서 쏟아지는 데이터를 AI 플랫폼으로 전 직원이 활용한다.

한국은 290억원 실증사업의 성과를 지역 중소기업까지 확산시키는 것이 관건이다. 대기업만 AI를 잘 쓰는 건 의미가 없다. 석유화학은 하나의 공장이 멈추면 협력사까지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산업이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AI가 운영자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30년 경력자의 판단을 시스템에 심어 신입도 베테랑처럼 일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실제 현장의 방향이다. 보루게의 자율운전도 GS칼텍스의 20만 센서도 결국 하는 일은 같다. 사람의 숙련도 편차를 없애는 것. 생각보다 늦지 않았다. 당신 공장의 첫 AI 센서는 어디에 붙일 것인가. 플레어스택인가, 상압증류탑인가, 아니면 구매 조달 데이터인가. 작은 센서 하나부터 시작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