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삼성전기의 ERP 수준은 글로벌 대비 "20%에 불과했다." 같은 해 삼성전기 내 SAP 인증 자격증 보유자는 0명. 4년 후인 2026년, 이 회사는 국내 최초로 프라이빗 클라우드 기반 차세대 ERP 구축을 완료했고, 이제 'AI 에이전트끼리 서로 일하는 공장'을 2028년까지 완성하겠다는 로드맵을 공개했다. 이게 단 한 회사의 이야기가 아니다. 국내 제조업의 ERP가 지금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그 현장을 들여다본다.

140시간을 34시간으로 — ERP 교체의 진짜 숫자

삼성SDS가 삼성전기에 구축한 차세대 ERP는 RISE with SAP 기반의 국내 첫 사례다. 주목할 숫자는 다운타임이다. 8.5TB에 달하는 SAP HANA 데이터베이스를 이관하면서 업무 중단 시간이 기존 140시간에서 34시간으로 76% 단축됐다. 제조 라인은 ERP 임시 서버 운영 방식으로 무중단 전환을 완료했다. 데이터 볼륨 관리(DVM) 기술로 DB 용량도 8.5TB에서 5.5TB로 35% 감소. 시스템 부하가 줄면서 제조·재무·원가 시스템의 업무 효율은 25% 이상 올랐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삼성전기는 ECC에서 S/4HANA로 넘어가기 전, 2년간의 선행 과제 기간 동안 불필요한 커스텀 개발(CBO) 프로그램을 대거 삭제하고 결산·재무·제조 프로세스의 약 40%를 슬림화했다. 그 결과 총 투자비를 약 62% 절감했다. 박준호 삼성전기 MIS그룹장의 설명이다: "프로세스 통합 표준화를 선행하고 전 법인에 동시 적용해 구축 기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했다." ERP 교체가 단순한 '버전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프로세스 재설계라는 점을 증명한 셈이다.

AI 에이전트 두 개가 한 회사에서 만나면 — A2A의 현실화

삼성전기의 다음 수순이 더 흥미롭다. ERP 교체를 마친 그 위에, 두 종류의 AI 에이전트를 동시에 올린다. 하나는 SAP의 AI 비서 '쥴(Joule)'이다. ERP 시스템 위에서 원자재 거래·제품 출하 분석·반복 업무 자동화를 맡는다. 다른 하나는 삼성전기가 자체 구축하는 AI 에이전트다. 출장 정산, 경비 처리, 협력사 문서 송수신 등 ERP 밖의 경영지원 업무를 처리한다. 삼정KPMG의 AI 개발 플랫폼 '카이젠'을 활용해 올해 10월까지 구축을 마칠 예정이다. 내년 2분기부터는 SAP BTP 도입과 함께 쥴의 활용 범위도 전사로 확대된다.

핵심은 이 두 에이전트가 서로 대화한다는 점이다. 구글이 2025년 4월 공개한 A2A(Agent-to-Agent) 프로토콜을 기반으로, 서로 다른 플랫폼·다른 개발사·다른 목적의 AI가 하나의 워크플로를 함께 처리한다. 쥴이 생산 관련 업무를 자동화하는 동안 자체 에이전트는 경영지원을 처리하고, 필요한 데이터는 서로 주고받는다. 사람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의사결정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구조다.

이게 먼 미래 이야기가 아니다. GS네오텍은 이미 유통업체를 대상으로 자체 AI 에이전트 플랫폼 '에이아이디어'의 A2A 기술 시연을 마쳤다. 2026년 3분기 중 PoC 계약을 논의 중이다. 한 SI 업체 관계자는 "지난해 연말부터 고객사로부터 A2A 구축 문의가 분기당 1건씩 들어오고 있다"고 전했다. 이제 막 시작된 시장이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ERP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 플랫폼 전쟁의 서막

삼성전기 사례가 주는 가장 큰 시사점은 ERP가 더 이상 '백오피스 시스템'이 아니라는 점이다. ERP는 이제 AI 에이전트가 올라가는 운영체제(OS)로 진화하고 있다. SAP의 쥴, 오라클의 AI 에이전트, 그리고 기업들이 자체 구축하는 커스텀 에이전트들이 이 OS 위에서 협업하는 시대다.

국내 ERP 시장도 이 흐름에 올라타고 있다. 더존비즈온은 AI 솔루션 '원(ONE) AI'를 출시 6개월 만에 2,290여 개 기업과 계약했고, ERP 화면 내에서 대출·이체·보험까지 통합하는 'ERP 뱅킹'을 제주은행과 실험 중이다. 영림원소프트랩은 K-시스템 에이스의 클라우드 ERP 매출이 전년 대비 25.3% 성장했고, 로우코드 앱 개발 플랫폼 '플렉스튜디오'와 브레인스토밍 툴 '에버레스크'로 ERP 생태계를 확장 중이다. SAP코리아의 클라우드 매출도 전년 대비 72.8% 급증한 2,196억 원을 기록했다.

맥킨지가 지난해 AI 도입 기업 109곳을 조사한 결과, 84%가 '효율성 제고'를, 82%가 '매출 성장'을 AI 도입 목적으로 꼽았다. 한국 제조업의 ERP 교체 물결은 단순한 기술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이 두 목표를 동시에 노리는 전략적 전환이다.

필자가 현장에서 본 ERP와 AI의 접점

SI 현장에서 ERP를 15년 넘게 다뤄온 입장에서, 이 흐름을 보면 한 가지가 확실해진다. ERP 교체 프로젝트에서 가장 많이 실패하는 지점은 기술이 아니라 '프로세스 표준화 거부'다. 각 부서가 "우리는 이렇게 해왔다"며 커스터마이징을 요구하고, 그걸 다 들어주다 보면 예산이 두 배로 뛰고 일정은 두 배로 늘어진다.

삼성전기가 2년간 선행 과제로 프로세스 40%를 슬림화하고 투자비 62%를 절감한 건, 그 함정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AI 에이전트를 도입하려는 기업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AI에게 맡기기 전에, 우리 프로세스가 AI에게 맡길 만큼 정리되어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A2A는 정리된 프로세스 위에서만 작동한다. 혼돈을 AI에게 떠넘기면 AI도 혼돈을 증폭시킬 뿐이다.

2028년, AI가 일하는 공장이 온다

삼성전기의 목표는 2028년까지 SCM 계획이 ERP 실행과 자동으로 연결되고, 사람의 판단이 필요한 영역은 AI 에이전트가 지원하며, 경영 목표와의 괴리가 발생하면 AI가 분석해 대응 방안을 마련하는 통합 체계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 로드맵이 성공하면, 한국 제조업의 ERP는 '기록 시스템(System of Record)'에서 '실행 시스템(System of Action)'으로 진화하는 첫 사례가 된다.

아직 대부분의 국내 중견 제조사들은 ECC 6.0의 지원 종료 시점(2027~2030년)을 앞두고 '어디로 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단계다. 삼성전기와 LG CNS, GS네오텍이 이미 A2A PoC에 들어갔다는 건, 그 고민의 답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는 신호다. ERP 교체는 끝이 아니라, AI가 기업의 운영체제가 되는 시대의 출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