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9일, 정부가 "제조AI에 2030년까지 20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ERP 담당자들 사이에선 반응이 갈렸다. "또 탑다운 정책이네,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라는 쪽과 "드디어 ERP가 진짜 전략 플랫폼이 되는구나"라는 쪽. 결론부터 말하면, 후자가 맞다. 이 20조는 단순한 보조금이 아니라, ERP를 AI 에이전트 허브로 바꾸는 신호탄이다.

20조 청사진, 숫자로 보면 이렇다

산업통상부가 29일 발표한 '대한민국 제조업 대전환의 길: 제조AI 2030 전략'은 구체적인 숫자로 가득했다.

  • 민관 합동 20조 원 투자 → 100조 원 이상 부가가치 창출
  • 제조업 AI 활용률 40%까지 상승 → 생산성 50% 향상
  • GDP 90조 원 증가, AI 팩토리 수출 100억 달러
  • 제조 특화 휴머노이드: 올해 20개소 → 내년 100개소
  • 150조 원 국민성장펀드 연계, 전문인력 3만 명 양성

김정관 산업부 장관은 "M.AX(제조업의 AI 전환)는 우리 제조업의 미래 경쟁력과 생존을 좌우할 핵심 과제"라고 말했다. "단순한 보고서에 그치지 않고 현실 세계에서 실질적 가치를 창출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핵심은 3가지다. 국가 차원의 제조데이터 라이브러리 구축, 제조AI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 산업단지 기반 M.AX 클러스터 조성. 이 세 가지가 현장에 내려오면, 결국 데이터를 다루는 ERP가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다.

에이전틱 ERP는 이미 시작됐다

정부 정책과 별개로, ERP 시장은 이미 AI 전환의 한복판에 있다. 세계 최대 기업용 소프트웨어 업체 SAP는 AI 비서 '쥴(Joule)'을 ERP 전반에 내장하며 14가지 자동 실행 에이전트를 공개했다. 연내 40가지로 확대할 계획이다. 지난 4월 하노버 메세에서는 공장 운영·물류·자산 관리를 AI가 직접 처리하는 수준까지 선보였다. SAP는 향후 2년간 AI 분야에만 20억 달러(약 2조 8천억 원)를 투자한다.

국내도 움직임이 빠르다. 더존비즈온은 AI 플랫폼 'ONE AI'가 출시 1년 만에 7,000개 기업, 11만 8,000명 사용자를 확보했다. 지난해 연결 매출 4,463억 원으로 역대 최대 실적을 냈다. EQT의 경영권 인수 이후 AI·클라우드 전환에 속도가 붙었다는 평가다.

영림원소프트랩도 주목할 만하다. 권영범 대표는 지난 5월 파주 R&D센터 '와이스페이스' 개소식에서 "올해를 제2의 창업으로 삼아 전사적 혁신을 AI 기반으로 진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영림원의 지난해 매출은 798억 원으로 3년 연속 성장. 특히 구독형 SaaS 제품인 '시스템에버' 계약은 전년 대비 142% 급증했다. 핵심 ERP 제품 'K-시스템 에이스'는 AI 분석·자연어처리를 결합해 SCM·MES까지 통합하는 플랫폼으로 진화 중이다.

삼성전기에서 배우는 진짜 교훈

정부 정책과 벤더의 약속이 아니라, 실제 필드에서 증명된 사례가 더 중요하다. 삼성SDS는 지난 4월, 삼성전기의 차세대 ERP 시스템을 국내 최초로 SAP 프리미엄 서플라이어 기반 클라우드로 전환했다. 결과는 구체적이다.

  • 업무 중단 시간: 140시간 → 34시간 (76% 단축)
  • DB 용량: 8.5TB → 5.5TB (35% 축소)
  • 업무 효율: 25% 이상 개선

삼성전기 박준호 MIS그룹장은 "ERP, MES, SCM 등 분산된 데이터를 단일 BW 데이터베이스로 통합해 실시간 분석 환경을 구축한 국내 최초 사례"라고 밝혔다. 삼성SDS 송해구 부사장은 "제조, 서비스, 유통뿐 아니라 금융·공공·방산까지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대기업 이야기라고 넘기기엔 이르다. 업무 중단 76% 단축, DB 35% 축소는 어떤 규모의 기업에도 적용 가능한 인프라 원리다. 문제는 "우리 회사도 이 수준의 전환이 가능한가"가 아니라 "우리 회사 데이터는 이 전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는가"다.

제조AI 시대, ERP 담당자가 지금 챙겨야 할 3가지

① 데이터부터 정비하라. AI는 정제된 데이터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제조AI 전략의 첫 번째 축이 '국가 제조데이터 라이브러리'인 이유다. 부처별로 흩어진 제조 데이터를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도서관을 세우겠다는 건, 그만큼 현장 데이터의 품질이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ERP 담당자라면 지금부터라도 마스터 데이터 정합성, 코드 체계, 이력 관리 현황을 점검하자. AI 에이전트가 아무리 똑똑해도, 기초 데이터가 엉망이면 헛소리만 한다.

② 클라우드 ERP 전환 로드맵에 AI를 포함시켜라

영림원의 SaaS 계약 142% 증가는 우연이 아니다. 구독형 클라우드 ERP로 전환해야 AI 기능이 자연스럽게 내장된다. 온프레미스 ERP에 AI를 덧붙이는 건 기름과 물 섞기다. 삼성전기의 사례처럼 클라우드 전환 자체가 다운타임 감소·DB 최적화·실시간 분석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다.

③ 우리 회사에 맞는 AI 시나리오를 작게 시작하라

정부의 20조, SAP의 20억 달러 같은 숫자에 압도될 필요 없다. 당장은 '구매 발주서 자동 생성', '재고 이상치 알림', '실적 리포트 자연어 요약' 같은 작은 AI 에이전트 한두 개로 시작해도 된다. 중요한 건 "AI가 곧 ERP의 기본 기능이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팀 내 AI 리터러시를 키우는 것이다.

정리: ERP는 이제 관리 도구가 아니라 에이전트 허브다

정부의 20조 투자, SAP의 에이전틱 ERP, 영림원의 AI 기반 제2 창업 선언 — 방향은 하나다. ERP가 단순히 재무·재고·인사를 '관리'하는 도구에서, AI 에이전트가 스스로 판단하고 실행하는 '허브 플랫폼'으로 진화한다는 것.

이 변화는 먼 이야기가 아니다. 삼성전기는 이미 34시간 만에 ERP 전체를 클라우드로 옮겼다. 더존비즈온의 AI ERP는 7,000개 기업이 매일 쓰고 있다. 영림원은 AI 기반 생산성 50% 향상을 올해 목표로 내걸었다.

제조AI 시대에 ERP 담당자가 해야 할 질문은 하나다: "우리 회사의 ERP는 AI 에이전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