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하나에 3조 원, 12년, 임상 통과 확률 10%. AI가 이 판을 뒤집는다고 모두가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유효물질을 찾아내 임상까지 진입시킨 제약사는 손에 꼽는다. 대웅제약은 8억 종 화합물에서 후보물질을 2개월 만에 찾아냈다. 한미약품은 근육까지 늘리는 비만약을 80% 빠르게 설계했다. JW중외는 로봇이 합성하고 AI가 검증하는 자율 연구실을 돌린다. 임상 1상 성공률 90%. 말로만 AI가 아니라 직접 짜서 성과 낸 제약사들의 전략을 들여다본다.

8억 화합물, 2개월 — 대웅제약이 증명한 속도

대웅제약의 AI 플랫폼 DAISY는 웹 포털 하나로 끝난다. 연구원이 타깃 단백질을 입력하면 분자도킹·가상탐색·ADMET 예측 결과가 2~3분 안에 메일로 돌아온다. 뒤에는 DAVID라는 8억 종 화합물 분자 모델 DB가 돌고 있다. 클릭 몇 번이면 신약 후보를 찍어내는 구조다.

실제 성과는 빠르게 나왔다. 통상 1년 이상 걸리는 대사질환 듀얼 타깃 유효물질 발굴을 2개월 만에 끝냈다. 단편 기반 설계 도구 DAIFRAG로는 결합력을 50만 배 높인 후보물질을 찾았다. 고려대 안암병원과의 공동연구에선 3개월 만에 신규 타깃을 확보했다.

대웅제약 신승우 AI신약팀장은 이코노미스트 인터뷰에서 "초기엔 실험 파트의 거부감도 있었으나 성과가 나오니 오히려 협조 요청이 쇄도한다"고 말했다. 연구자 피드백을 모델에 반영하는 '휴먼 인 더 루프' 시스템까지 구축한 상태다. 최종 목표는 "3~5년 내 AI가 발굴한 물질이 실제 신약으로 나오는 것." 외부 오픈소스·협력으로 데이터를 보완하며 폐쇄형이 아닌 개방형 생태계를 지향한다.

근육 늘리는 비만약, 80% 단축 — 한미약품 HARP의 설계 혁신

한미약품의 HARP-pSAR는 적은 데이터로도 돌아간다. 수십 건 내부 실험 데이터만으로 표적·비표적 수용체 활성을 높은 정확도로 예측한다. 여기에 양자화 기술을 적용해 연산 비용을 낮췄고, 로컬 워크스테이션 한 대로도 구동된다.

이 플랫폼에서 나온 HM17321은 세계 최초로 '체중 감량과 근육 증가'를 동시에 실현하는 비만 신약이다. 후보물질 발굴 속도를 기존 대비 80% 단축해 미국 임상 1상에 진입시켰다. ADA 2026에서는 마이오스타틴 억제 근육 치료제 HM500197도 공개됐다.

ISMB 2026에서 한미약품 한승수 선임연구원은 "AI 예측→실험 검증→후보 최적화→임상 개발까지 연결된 선도 사례"라고 발표했다. 최인영 부사장도 "AI가 데이터 분석 도구를 넘어 연구 파트너로 신약 설계 방향을 제시하고 시행착오를 단축한다"고 평가했다. 한미약품은 스탠다임·아이젠사이언스 등 외부 AI 기업과도 맞춤형 공동개발을 병행하며 내부 플랫폼과 외부 데이터를 결합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로봇이 합성하고 AI가 검증 — JW중외 '자율 연구실'

JW중외제약의 JWave 플랫폼은 4만 5천 종 화합물 데이터에 500여 종 세포주·오가노이드·동물모델 유전체, 20여 종 AI 모델을 통합했다. 유효물질 탐색부터 선도물질 최적화까지 신약 개발 전주기를 커버한다.

대사질환 치료제 후보물질은 국가신약개발사업 과제로 선정돼 비임상 진입을 준비 중이다. 희귀 신경발달장애 치료제 DDC-02는 WODC USA 2026에서 비임상 결과를 공개했고, 2028년 글로벌 다국가 임상을 목표로 한다.

핵심은 JWave와 로봇 합성자동화의 연계다. AI가 후보물질을 설계하면 로봇이 자동 합성·생산하고, 그 결과를 다시 AI가 학습하는 루프가 닫혔다. 보건복지부가 22억 원 규모 '구조기반 AI신약개발지원' 과제 주관기관으로 JW중외를 선정한 이유다. 데이터·AI·로봇 삼박자가 맞물려 도는 국내 첫 '자율 연구 플랫폼'이다.

숫자가 말한다 — 장밋빛 아닌 현실

AI 신약, 말만 무성한 게 아니다. 숫자가 증명한다. 보스턴컨설팅그룹 분석에 따르면 AI가 발굴한 후보물질의 임상 1상 성공률은 80~90%. 기존 40~60%에서 두 배 가까이 뛰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식약처 자료 기준 AI 도입 시 신약 개발비는 3조 원에서 6,000억 원으로, 개발 기간은 12년에서 7년으로 단축된다.

하지만 현장은 다르다. 한국바이오협회가 44개 제약·바이오 기업을 조사한 결과 89.1%가 AI를 활용 중이거나 도입을 검토하고 있지만, 67.3%는 신약개발 부서 내 AI 전문인력이 없다고 답했다. AI 도입 의지는 높은데 실제 실행할 사람이 없다. 인력·데이터·자금이 여전히 3대 병목이다.

시장도 반응하고 있다. AI 신약개발 기업 인실리코 메디슨은 2025년 홍콩 메인보드 IPO로 4,200억 원을 조달했다. 2024년 매출만 1,200억 원. AI 신약이 '연구 과제'가 아니라 '사업 모델'임을 증명한 셈이다. 정부도 K-AI 신약개발 전주기 사업에 371억 원(2025~2029), 연합학습 기반 K-MELLODDY에 348억 원(2024~2028)을 투입 중이다.

늦지 않았다 — 작은 데이터부터 시작하면 된다

대웅제약 2개월, 한미약품 80% 단축, JW중외 자율 연구실. 이들은 클라우드에 수천억 원을 쏟아부은 게 아니다. 대웅은 8억 화합물 DB를, 한미는 수십 건 자체 실험 데이터를, JW는 4만 5천 화합물을 각자 보유한 데이터에서 출발했다. 핵심은 AI 플랫폼을 빌려 쓰느냐가 아니라, 내 데이터를 AI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했느냐다.

유한양행은 2027년 1분기 완성형 플랫폼 Yu-NIVUS를 예고했고, SK바이오팜은 생성형 AI로 히트 발굴 기간 60% 단축과 비용 절반 절감을 확인했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전 임직원 AI 교육으로 첫발을 뗐다. 정부도 K-AI 신약개발에 371억 원을 투입하며 전임상-임상 단절을 잇고 있다. 시작은 작아도 된다. 연구 노트에 쌓인 실험 데이터부터 정리해보라. AI가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그 순간부터 당신 연구실의 AI는 이미 가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