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한국 B2B 시장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Claude를 만든 앤트로픽, Gemini의 구글, ChatGPT의 오픈AI — 이 세 회사가 모두 한국 SI 기업의 전화번호를 찾고 있다. 모델 하나만 들고 한국 기업 시장에 직진하던 작년과 완전히 다른 풍경이다.

SI 기업, AI 모델의 B2B 게이트웨이가 되다

삼성SDS가 지난 25일 앤트로픽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이로써 삼성SDS는 오픈AI(지난해 12월), 구글 클라우드(올해 4월), 앤트로픽까지 — 글로벌 3대 AI 모델 모두와 손을 잡은 유일한 국내 기업이 됐다.

숫자를 보면 이유가 선명하다. 삼성SDS 임직원이 클로드와 주고받은 메시지는 도입 초기 몇 주 만에 100만 건을 돌파했다. 현재 20개 삼성 관계사, 약 7만 명이 클로드 엔터프라이즈를 업무에 사용 중이다. 사용자 절반은 AI 코딩 도구 '클로드 코드'를 활용한다. 이준희 삼성SDS 사장은 "앤트로픽의 AI 기술력과 삼성SDS의 산업별 디지털 혁신 경험을 결합해 국내 AI 시장의 성장을 함께 주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단순 리셀러가 아니다. 삼성SDS는 삼성 클라우드 플랫폼(SCP), GPUaaS, 생성형 AI 플랫폼 '패브릭스', 협업 솔루션 '브리티웍스'까지 — 인프라부터 애플리케이션까지 AI 풀스택을 제공한다. 글로벌 AI 기업 입장에선 모델만으로 접근할 수 없는 제조·금융·공공의 보안·규제·레거시 연동을 삼성SDS가 해결해주는 구조다. 크리스 시아우리 앤트로픽 인터내셔널 총괄도 "삼성SDS는 한국 기업의 클로드 도입을 가속할 핵심 역량을 갖췄다"고 인정했다.

ERP·금융·제조까지 — AX는 이제 현장 게임이다

SI 기업의 AI 게이트웨이 역할은 삼성SDS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더존비즈온은 24일 개발·기획·설계 직군 전원에 클로드를 전면 도입했다. ERP 기업이 자신의 개발 조직 전체를 AI로 재편한 사례다. 코드 생성부터 디버깅, 기술 문서 작성까지 개발 전 과정에 AI를 적용하고, 여기서 쌓은 경험을 자사 ERP AI 서비스인 'ONE AI'에 즉시 반영하는 선순환을 만들었다.

KT는 더 과감하다. 시중은행 5곳 중 4곳의 AI 고객센터(AICC)를 구축했고, 보험사에는 AI 세일즈 어시스턴트를 도입했다. 베테랑 설계사의 노하우와 복잡한 보험약관을 AI가 실시간 분석해 영업 현장에 제공하는 식이다. KT AX엔지니어링본부 김영민 상무는 "기업들이 데이터를 많이 가지고 있지만,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AX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분수령"이라고 말했다.

KB금융은 한 발 더 나갔다. 5개 계열사에 약 80개 AI 에이전트를 가동 중이며, 국민은행 금융상담 에이전트는 관련 업무시간을 70.2% 단축했다. 외부 개발자 1명 월 투입비용이 약 1,400만 원인 데 비해 AI 이용 비용은 5분의 1 수준이다. 박형주 KB금융 AI·DT추진본부장은 "앞으로는 사번을 부여받은 AI 에이전트도 나올 수 있다"며 "에이전트는 일하고 인간은 감독하는 철학으로 금융 비즈니스가 재편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왜 지금, 왜 SI인가 — B2B AI 도입의 방정식이 바뀌었다

이 흐름에는 분명한 구조적 이유가 있다. 기업이 생성형 AI를 도입하려면 모델만으로는 안 된다. GPU 인프라, 사내 데이터 연계, 보안, 규제 대응, 기존 ERP·그룹웨어와의 연동, 운영 인력까지 필요하다. 글로벌 AI 기업은 모델은 만들 수 있어도 한국 제조업 공장의 레거시 시스템이나 금융권의 보안 규제까지 감당할 수 없다.

SAP의 2분기 실적이 단적으로 보여준다. 클라우드 매출이 전년 대비 24% 증가한 63억 유로, 대형 계약의 90% 이상에 AI 또는 데이터 클라우드가 포함됐다. SAP CEO 크리스티안 클라인은 "기업들은 중요한 업무 프로세스와 데이터를 기반으로 정확하고 규정을 준수하는 AI 결과를 얻기 위해 SAP를 선택하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AI 모델의 경쟁력은 모델 자체보다 '누가 현장에 제대로 붙이느냐'로 옮겨가고 있다.

한컴의 사례도 같은 맥락이다. 상반기 별도 기준 매출 986억 원으로 역대 최대, AI 제품 매출은 5개월 만에 지난해 연간 실적(89억 원)을 넘어선 135억 원을 기록했다. 올해 AI 매출 목표는 315억 원. 4분기에는 에이전틱 OS를 출시하고 EU AI 규제와 GDPR에 대응하는 제품으로 유럽 공공·금융 시장까지 노린다. 한글과컴퓨터가 AI 기업으로 변신하고 있는 것이다.

ERP·SI 업계가 새 주도권을 잡을 타이밍

이번 주 한국 IT 뉴스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하나다. AI 모델 경쟁의 승자는 기술이 가장 뛰어난 기업이 아니라, 현장을 가장 잘 아는 기업이 될 것이다. 모델은 인프라가 되고, 진짜 부가가치는 '어떻게 붙이느냐'에서 나온다.

ERP·SI 업계에는 이것이 기회다. 그동안 클라우드 전환에서 글로벌 CSP에 주도권을 뺏겼다면, AI 전환에서는 현장 데이터와 업무 프로세스에 대한 이해도라는 결정적 무기를 쥐고 있다. 삼성SDS가 보여준 '클라이언트 제로' 전략 — 자신이 먼저 써보고 검증한 뒤 고객에게 확산하는 방식 — 은 모든 B2B IT 서비스 기업이 참고할 만한 모델이다.

7만 명의 임직원이 클로드로 일하고, 80개의 AI 에이전트가 은행 업무를 처리하고, 5개월 만에 연간 AI 매출을 넘긴 한컴. 이 숫자들은 이제 'AI 도입을 검토 중'이라는 단계가 지났다는 신호다. 게임은 이미 시작됐고, ERP와 SI 현장을 아는 기업이 다음 판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