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P 안 깔면 도태된다는 위기감에 기업들은 수백억을 베팅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2026년 2월, 법원이 한국동서발전의 손을 들어줬다. 더존비즈온에 지급한 63억 중 55억을 돌려받으라는 판결. 공정률 76.5%에서 멈춘 ERP 국산화 프로젝트의 최후였다. 신세계백화점은 SAP S/4HANA 전환을 오픈 3주 앞두고 무기한 미뤘다. 수백억짜리 프로젝트 두 개가 기술 문제로 무너진 게 아니다. ERP 실패 70%는 코드가 아니라 문화에서 터진다.

범위부터 못 박지 않으면 예산은 복리로 불어난다

한국동서발전이 2019년 시작한 ERP 국산화. 외산을 걷어내고 국산으로 바꾸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계약금 63억. 2021년 2월 마감 시점에 공정률 76.5%. 1년 3개월이 더 지난 2022년 5월에도 83.7%. 3년 넘게 해도 끝나지 않자 계약 해제. 55억 반환 판결까지 4년이 더 걸렸다.

신세계백화점은 다르지 않았다. SAP S/4HANA PCE 도입. 7월 1일 오픈 목표였지만 무기한 연기. EY컨설팅과 '네 탓' 공방이 붙으면서 지체상금만 수백억. 두 사례 공통점은 하나다. 요구사항 정의, 데이터 이관, 변화관리라는 '0단계'를 건너뛰고 시스템부터 깔려 했다는 점.

범위를 확정 짓지 않고 시작하는 순간 예산은 통제 불능이 된다. 모든 부서가 자기 요구를 쏟아내고 벤더는 변경주문서(Change Order)로 응수한다. 한국 제조업엔 특수성까지 겹친다. 국세청 전자세금계산서 API, 현대·기아·삼성 발주처 EDI, 관세청 수출입 신고, 한전 에너지 데이터까지. 해외 벤더가 견적에 넣지 못하는 숨은 비용들이다. 데이터 정제에 개발 예산의 1/10만 배정하는 게 업계 관행인데, 가동 후 나쁜 데이터가 시스템 신뢰를 무너뜨리는 데는 한 달이면 충분하다.

위에서 밀어붙이면 현장은 엑셀로 돌아간다

Standish Group이 30년간 추적한 데이터다. ERP 프로젝트 성공률 16.2%. 52.7%가 예산 189% 초과. 31.1%는 중단. Gitnux 2026년 통계는 더 구체적이다. 평균 비용 초과 178%. 실패 프로젝트당 평균 240만 달러 손실. 실패 원인 1위는 변화관리 부실(60%).

한국 위계 문화에선 이 문제가 더 치명적으로 작동한다. 위에서 'ERP 쓴다'고 밀어붙이면 조직은 표면적으로 따른다. 하지만 정작 현장은 엑셀로 돌아간다. 'ERP는 있는데 엑셀로 일한다'는 말이 농담이 아닌 현실이다.

더존 iCUBE에서 SAP으로 전환할 때 벌어지는 전형적 패턴. '기존 방식 그대로' 구현하려고 수천만 원 들여 커스터마이징한다. 2년 후 업그레이드할 때 그걸 다시 수천만 원 들여 고친다. 담당 개발자가 퇴사하면 유지보수는 불가능. Simplico의 분석이 정확하다. 소프트웨어는 전체 작업의 30%에 불과하다. 나머지 70%인 프로세스 재설계, 데이터 이관, 교육, 변화관리가 만성적 예산 부족에 시달린다. 변화관리와 교육에 전체 예산 20% 이상 배정한 프로젝트만 살아남는다는 게 정설이다.

필자가 SI 신입 시절, 12개월짜리 공공 프로젝트에 투입된 적이 있다. 밤을 새고, 주말을 반납하고, 결국 결혼기념일을 프로젝트실에서 보냈다 — 그날 퇴사를 결심했다. 그 프로젝트는 '온타임'으로 끝났고 특진까지 받았지만, 퇴사 사유는 기술이 아니라 '이렇게 살 순 없다'는 문화적 판단이었다.

이후 KMS 컨설턴트로 H/K 자동차, H제철, A병원, 전력공기관 등 대규모 프로젝트의 PM을 맡으면서 본 것은 하나였다. 예산이 초과되는 프로젝트는 항상 같은 패턴을 밟았다. 요구사항 정의를 '개발하면서 바꾸면 되지'로 넘기고, 데이터 이관을 '나중에 하자'고 미루고, 현장 교육을 '메뉴얼 나눠주면 되지'로 생략했다. 이 '0단계 건너뛰기'를 20년간 150개가 넘는 업종에서 똑같이 반복하는 걸 지켜봤다.

삼성전기는 표준화를 먼저 했다. 그게 전부였다

삼성SDS가 2026년 4월 완료한 삼성전기 차세대 ERP. 이 프로젝트가 흥미로운 건 기술이 아니라 순서 때문이다. 프로세스 통합과 표준화를 먼저 끝냈다. 그다음에 시스템을 올렸다.

결과는 숫자로 증명됐다. 8.5TB HANA DB 전환 중 업무 중단 시간이 140시간에서 34시간으로 76% 단축. DVM 기술로 DB 용량은 8.5TB에서 5.5TB로 35% 축소. 제조·재무·원가 시스템 성능 개선으로 업무효율 25% 향상. 전 법인에 동시 적용했고 ERP·MES·SCM 분산 데이터를 단일 BW로 통합해 실시간 분석 환경을 구축했다.

핵심은 단순하다. '우리 회사만의 방식'을 시스템에 맞추려 하지 않고, 업무 자체를 표준에 맞췄다. 커스터마이징이 아니라 프로세스 변경을 선택한 것이다. 박준호 삼성전기 MIS그룹장은 "프로세스 통합·표준화를 선행하고 전 법인에 동시 적용해 구축 기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했다"고 말했다. 기술이 아니라 실행 순서가 승패를 갈랐다.

0단계만 챙겨도 예산 2배 초과는 피할 수 있다

ERP 예산 2배 초과의 주범은 비싼 라이선스도 느린 서버도 아니다. 범위 미확정, 데이터 방치, 변화관리 생략이라는 세 가지 '0단계 생략'이 만드는 복리 이자다. 한국동서발전 55억 원, 신세계 수백억 원 지체상금, 중소기업 평균 240만 달러 손실이 모두 같은 패턴에서 터졌다.

생각보다 늦지 않았다. 삼성전기가 증명했듯 표준화 먼저, 시스템은 나중이다. 범위를 못 박고, 데이터를 정제하고, 현장을 설득하는 0단계만 제대로 밟으면 예산 2배 초과는 피할 수 있다.

ERP 영업 10년을 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 고객사가 '검증된 레퍼런스'를 요구하는 진짜 이유는 기술 검증이 아니라 '우리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이다. 필자가 만난 150여 개 업종의 대표와 담당자 중, '0단계'를 내부적으로 먼저 챙긴 기업은 단 한 곳도 실패하지 않았다. 문제는 대부분의 기업이 0단계에 예산을 배정하는 걸 '비용'으로 보지 '투자'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삼성전기의 사례가 교과서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필자는 그보다 더 작은 규모에서도 똑같은 원리가 통하는 걸 봐왔다. 50인 규모 제조업체가 MES 도입 전에 공정 표준화부터 했고, 결과는 예산 초과 0%였다. 기술보다 순서가 먼저다. 이 순서를 바꾸려는 유혹을 이겨내는 게 ERP 프로젝트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RP는 시스템이 아니라 실행 순서의 싸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