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한국동서발전은 더존비즈온과 63억 원 규모 ERP 계약을 체결했다. 2021년 2월 완공이 목표였다. 3년 뒤인 2022년 1월, 진척률 80%에서 프로젝트는 멈췄다. 계약해제, 기성금 반환 소송, 지체보상금 청구. 63억 원은 법정으로 갔다. 공기업 최초 ERP 국산화의 상징이 될 뻔한 프로젝트의 결말이었다. 그런데 원인을 추적해 들어가 보면 SAP도 Oracle도 더존도 아니었다. RFP 쓰기 전에 건너뛴 '0단계'가 모든 걸 삼켰다.
63억 프로젝트가 무너진 진짜 이유 — 0단계를 건너뛰었다
한국동서발전 사례를 CIO 코리아가 2025년 분석한 리포트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RFP 전 0단계(범위 정의·거버넌스·KPI·마이그레이션 전략)가 생략되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실제로 동서발전은 기존 시스템과 '동일 수준 UI·기능'이라는 모호한 요구사항 하나로 출발했다. 데이터 구조 분석에만 수개월이 들어갔고 더존이 제안한 제품의 DB 교체 작업이 추가로 발생했다. 정의되지 않은 범위는 곧바로 일관성 없는 SI 입찰로 이어졌고, 변경 주문은 눈덩이처럼 불었다. 예산 2배, 일정 1.5년 초과. 더존은 "과도한 요구·비협조 탓"이라 했고 동서발전은 "역무 불이행·합의서 위반"이라 맞섰다. 양쪽 다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이 싸움이 0단계에서 이미 예정돼 있었다는 점이다. 범위 기준선 없이 시작한 프로젝트가 예산 안에서 끝난 사례는 역사에 없다.
벤더 탓은 편하다 — 하지만 데이터는 내부를 가리킨다
CIO 코리아 2026년 6월 칼럼에 실린 월든대 박사 논문을 보자. 최근 5년 내 ERP를 성공시킨 펜실베이니아 중소기업 IT 관리자 6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벤더가 문제였나?"라는 질문에 단 한 명도 벤더를 지목하지 않았다. 6명 전원이 꼽은 공통 실패 요인은 세 가지였다. 첫째, 전략 목표와 ERP 목적을 연결하지 못한 준비 부족. 경영진이 직접 참여하지 않고 IT 팀에 떠넘긴 프로젝트는 백이면 백 실패했다. 데이터 마이그레이션을 첫날부터 핵심 과제로 삼은 기업은 5곳 중 4곳이 단계적 구축을 선택해 리스크를 분산했다. 둘째, 역할 기반 부서별 맞춤 교육의 부재. "교육 예산이 ERP 도입 예산의 15% 미만이면 실패 확률 70% 이상"이라는 게 6명의 공통된 경험이다. 셋째, 범위 관리 규율. 추가 보고서, 비표준 프로세스 요청이 누적될 때 공식 기준선·서면 비즈니스 근거·목표 대비 검토로 차단한 기업만이 예산을 지켰다.
임팩트플로우 2026년 한국 중소기업 현장 인터뷰도 같은 결론이다. 도로시설물 제조업체는 "사장님이 견적-시공-정산을 한눈에 보려 했지만 영업·시공·생산 현장의 협조가 미흡해 결국 견적 모듈만 도입하고 엑셀로 회귀했다"고 말했다. 의료기기 기업은 "더존 아마란스텐 중단으로 교체했지만 새 시스템도 사전 예산 통제가 약해 동일 문제가 반복됐다"고 털어놨다.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변화 관리, 범위 규율, 현장 교육이 진짜 비용을 결정한다는 증거다.
한국 ERP에는 해외 팀이 모르는 '통합 블랙홀'이 있다
심플리코 2026년 분석은 한국 제조업 ERP 도입의 숨은 비용을 구체적인 숫자로 풀어냈다. 국세청 전자세금계산서 API, 발주처 EDI(현대·기아·삼성 협력사는 사실상 의무), 관세청 수출입, 한국전력 에너지 데이터 연동. 이것들은 해외 ERP 팀이 범위 산정조차 못 하는 영역이다. 계약 전에 이 연동 시스템 항목, 커넥터 책임 소재, API 변경 시 처리 방식을 명시하지 않으면 일정과 예산에 구멍이 뚫린다. 심플리코는 8개 체크포인트를 제시한다. 국세청 API, PIPA, ISMS-P, 발주처 EDI, 더존 데이터 이관, K-ESG 필드, 가동 후 90일 지원, 현장 교육 예산 15% 이상. 이 중 하나라도 누락되면 예산 30~50% 추가 발생은 필연이다.
더 큰 문제는 위계 문화다. 경영진이 ERP 도입을 강요하면 현장은 표면적으로 수용한다. 그러나 실무자는 엑셀을 병행하고, 2년 뒤면 "ERP는 있지만 엑셀로 일한다"는 상태가 된다. 데이터 이관 정제에 개발 예산만큼 배정해야 하는데, 실제 현장에서는 10분의 1도 배정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커스터마이징에 수천만 원 들여 '기존 방식 그대로' 구현했지만 업그레이드 불가 상태가 되고, 다시 수천만 원 들여 수정하는 사이 담당자는 퇴사한다. 이 악순환은 기술이 아니라 문화와 제도에서 비롯된다.
이런 문제들은 ERP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일이다. SI 프로젝트 15년 차인 필자도 수없이 봤다. RFP에 없는 요구사항이 현장에서 쏟아지고, 경영진은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나' 하고, 현장은 '이 시스템으로는 일 못 한다'고 엑셀을 열고, 2년 뒤 다시 ERP 교체를 검토한다. 이 순환을 끊은 기업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실패에서 배운 기업들은 '0단계'에 투자한다
삼성SDS가 삼성전기 ERP를 성공시킨 사례를 보면 패턴이 명확하다. 범위 기준선을 먼저 긋고, 단계적 구축으로 리스크를 나누고, 역할 기반 교육을 의무화하며, 현장 KPI와 ERP 성과를 연계했다. 여기에 한국 특수 연동을 사전 점검하는 프로세스를 추가했다. 나이키가 1억 달러, 웨이스트매니지먼트가 5억 달러를 ERP에 날린 것도, 한국동서발전이 63억 원을 소송으로 보낸 것도 공통분모는 같다. 기술은 충분했다. 부족했던 건 기술 앞에 놓여야 할 질문이었다. "우리는 뭘 해결하려고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는가?"
ERP 도입을 검토 중이라면 이 다섯 가지만은 지키자. 범위 기준선을 문서화한다. 단계적 구축으로 한 번에 모든 걸 바꾸지 않는다. 교육 예산은 전체의 15% 이상으로 잡는다. 현장 KPI와 ERP 성과 지표를 연결한다. 국세청·EDI·PIPA 같은 한국 특수 연동을 계약 전에 점검한다. 이 다섯 가지 없이 시작하는 ERP 프로젝트는 63억 원짜리 법정 수업료를 미리 결제한 셈이다. "우리 회사 0단계는 언제 시작했나?"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조직이라면 예산 2배는 이미 확정된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