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항의 시간당 컨테이너 처리량은 75회다. 싱가포르는 80회, 중국 칭다오는 116회. 세계 7위 컨테이너 항만이란 타이틀 아래, 선두와의 격차는 숫자로 증명된다. 8921억 원짜리 질문이 시작된다. 이 돈이면 격차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부산항의 8921억 원 AI 실험, 38개 과제를 뜯어봤다
부산항만공사(BPA)가 2030년까지 8921억 원을 투입하는 항만 AI 대전환(AX) 로드맵을 내놨다. 국내 항만 최초다. 목표는 단순하다. 터미널 생산성 30% 향상, 인명사고 제로. 38개 세부과제의 핵심은 AI 기반 한국형 자동화 터미널이다.
국산 크레인과 트랜스퍼 크레인을 직접 제작하고 장비 통합 제어 시스템(ECS)을 구축한다. AI 에이전트가 컨테이너 적재 위치를 스스로 판단하고, 디지털트윈으로 운영 시나리오를 사전 실험한다. 자율주행 야드트럭과 트램셔틀이 사람 없이 물류를 이동한다. 2024년 4월 개장한 신항 7부두가 첫 자동화 모델이다.
BPA는 현대차와 자율주행·로보틱스 협력을 추진 중이고 UAE와는 피지컬 AI 공동 프로젝트도 진행한다. 2032년 1단계 완공 예정인 진해신항은 2조 5000억 원 규모 자동화 장비 시장을 열 전망이다. 숫자는 크지만, 글로벌 경쟁자들의 속도를 보면 안심할 수 없다.
싱가포르 Tuas, 이미 1000만 컨테이너를 자율 처리 중이다
싱가포르 Tuas Port는 2022년 개장 후 지금까지 1000만 개 컨테이너를 자율 처리했다. 200대 이상의 고속 충전 자율주행 전기차량이 중앙 관제센터의 디지털트윈 감독 아래 실시간으로 움직인다. 전기장비 전환으로 탄소 배출 50% 감축, 전력 사용량 60% 절감을 달성했다.
5G 민영망이 크레인과 차량을 하나의 신경망으로 묶고, AI 예지보전 시스템이 장비 고장을 사전에 감지한다. 완공 시 66개 선석에서 연간 6500만 TEU를 처리하는 세계 최대 자동화 항만이 된다. 참고로 2025년 싱가포르 전체 물동량은 역대 최대인 4466만 TEU였다. Tuas Phase 2는 2027년 매립 완료 후 2100만 TEU를 추가한다.
여기서 놓치면 안 되는 지점이 있다. Tuas는 초기 설계 단계부터 완전 자동화를 전제로 만들어졌다. 기존 항만에 AI를 덧씌운 '오버레이'가 아니라, 항만 구조 자체를 AI 운영에 최적화한 것이다. 한국이 진해신항에서 반드시 배워야 할 교훈이다.
중국은 화웨이 AI와 DeepSeek을 항만에 심었다
중국 천진항 2터미널은 '세계 최초 스마트 무탄소 터미널'을 내세운다. 장비 자동화율 88%, 운영 효율 15% 향상을 달성했다. 화웨이의 '판구' 대형 AI 모델 기반 'Port GPT'와 DeepSeek LLM을 적용해 운영·유지보수 효율을 45% 개선했다. 하역 작업이 수 시간에서 10분으로 단축된 건 덤이다.
칭다오항의 AI 크레인 스케줄링은 시간당 36.2회를 처리한다. 수동 운영 대비 16.8% 향상된 수치다. 흥미로운 건 투자 규모와 회수 기간의 차이다. 기존 장비에 AI를 결합하는 오버레이 방식은 투자회수 기간이 1~2년이다. 반면 신규 완전 자동화 항만은 7~15년이 걸린다. 200만 TEU급 터미널 기준 연간 5000만~7000만 달러의 운영비 절감 효과가 보고된다. 자동화는 인건비의 40~85%를 절감하고 전체 운영비를 25~55% 낮춘다.
다만 기존 항만을 개조하는 브라운필드 방식은 5G·RFID 인프라 구축에 500만~1500만 달러의 추가 투자가 필요하다. 선택은 간단해 보이지만, 어떤 항만을 목표로 하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1~2년 회수 vs 15년 회수, 항만의 AI 투자 방정식
AI 항만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숫자는 회수 기간이다. AI 오버레이 방식은 기존 크레인과 야드 장비에 센서·AI 모듈을 붙이는 방식으로 1~2년 안에 투자금을 회수한다. 반면 싱가포르 Tuas 같은 완전 자동화 신규 항만은 7~15년의 장기 회수 구조를 갖는다.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항만의 현재 상태와 미래 목표에 달렸다.
부산항이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최적 경로는 투트랙이다. 기존 터미널에는 1~2년 회수가 가능한 AI 오버레이로 당장 생산성을 끌어올린다. 동시에 진해신항은 Tuas처럼 처음부터 AI 운영을 전제로 설계한다. 이 전략이 실현되면 부산항은 단기 생산성 개선과 장기 경쟁력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 문제는 실행 속도다. 중국은 이미 화웨이·DeepSeek을 항만에 심었고, 싱가포르는 Phase 2 확장에 돌입했다. 더 늦기 전에 첫 번째 컨테이너 크레인에 AI 센서를 붙여야 할 때다.
8921억 원의 방향, 오버레이인가 네이티브인가
부산항이 선택한 길은 사실상 오버레이에 가깝다. 기존 항만 인프라 위에 AI를 입히고, 진해신항에서는 새로운 자동화 항만을 시도하는 투트랙 전략이다. 싱가포르는 처음부터 AI 네이티브 항만을 찍었고, 중국은 화웨이·DeepSeek 같은 자국 AI 생태계를 항만에 직결했다.
부산항의 강점은 제조 역량에 있다. 국산 크레인과 ECS 자체 개발은 기술 자립의 발판이다. 싱가포르와 중국이 장비를 수입한다면, 부산은 만든다. 이 차이는 장기적으로 유지보수 비용과 기술 종속성에서 갈린다. 문제는 속도다. 칭다오가 116회를 처리하는 동안 부산은 75회에 머물러 있다. 8921억 원의 집행 속도와 방향성이 격차를 결정할 것이다.
글로벌 물류는 지금 'AI 네이티브 항만'과 'AI 오버레이 항만'으로 나뉘는 중이다. 부산이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진해신항을 AI 네이티브로 설계하되, 기존 항만은 1~2년 회수가 가능한 AI 오버레이로 빠르게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전략이 유효하다. 8921억 원짜리 질문의 답은 하나다. 처음부터 AI를 염두에 두고 항만을 설계했는가, 아니면 이미 지어진 항만에 AI를 붙이고 있는가.